임진왜란을 일으킨 왜군은 1592년 4월 14일 부산진성을 함락 후 동래읍성으로 진군하였고, 성을 공격하기에 앞서 왜군은 취병장(吹兵場, 현 동래경찰서)에 군사들을 집결시킨 후
백여명의 병사들을 시켜서 동래읍성 남문으로 보내어 목패(나무로 만든 패)에다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우리에게 길을 빌려달라”
[전즉전의 부전즉가도(戰則戰矣, 不戰則假道)] 글을 써서 남문 밖에 세워두고 돌아갔다. 이에 동래부사 송상현은 목패(나무로 만든 패)에다
“싸워서 죽는 것은 쉽지만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전사이 가도난(戰死易 假道難)]
고 써서 적진에 던져
결사항전(決死抗戰, 죽을 각오로 맞서 싸움)을 표명하였다.
1592년 4월 15일 왜군은 동래읍성을 포위하고 전투를 시작하였고, 동래부사 송상현은 병사를 이끌고 적에 대항하여 싸웟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 적은 수로는 많은 적을 대적하지 못한다)으로
성이 함락되자 갑옷위에 조복(朝服, 관원이 조정에 갈 때 입는 예복)을 받쳐 입고 장렬히 전사하였다.
왜군은 송상현 동래부사의 충렬을 기려 동문 밖에 장사를 지내주었다고 한다.
송상현광장이 자리한 이곳은 예부터 ‘모너머 고개’라 불렸다. 지금은 고개라 느낄 수 없을 정도의 평지가 되었지만 과거에는 이곳을 경계로 부산의 안과 밖이 나뉘었다.
육지와 바다, 동래부와 부산부, 금관가야로부터 이어져 온 꼿꼿한 선비정신과 바다를 향한 거침없는 개척정신이 이곳을 중심으로 갈리었다.
이곳은 부산의 다양한 정체성이 나뉘는 경계지점이자, 다시 하나로 모여드는 중심이었던 것이다.
1978년 송상현 공의 동상을 이 자리에 모신 것도 이러한 역사성을 감안한 것이었다.
산업화 과정을 거치는 동안 이곳은 차량통행을 위한 도로로 바뀌었다. 1972년에는 도시 시설 확충을 대비하여 약100미터 폭의 도시계획시설(도로·광장)로 결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부산시민들은 이곳이 자동차를 위한 도로가 아니라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바뀌기를 희망하였다. 이러한 시민들의 간절한 바람을 부산시가 받아들여 2010년 8월 이 땅을 광장으로 조성하기로 결정하고, 명칭과 설계를 공모하여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송상현광장은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옛 것을 알면서 새 것도 안다)의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이땅의 역사를 후세에게 알려 더 밝은 미래를 이루어가는 공간으로 탄생시키고자 하였다. 광장의 조성 내용을 보면 송상현 공과 모너머 고개에 얽힌 역사성을 체험하고 기념하는 역사마당,
시민들의 다이내믹한 활동 공간을 담을 수 있는 다이내믹 부산마당, 시민들이 풍요로운 문화를 즐기며 삶의 품격을 누릴 수 있는 문화마당으로 조성하였다.
이 광장은 완성형의 광장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진행형 광장이다. 이 광장의 주인은 오로지 시민이다. 시민적 염원에서 시작되어 시민들의 희망을 담을 수 있는 광장으로 탄생되었기에, 이제 부산시민들이 주인이 되어 송상현광장을 미래형 광장으로 가꾸어 나가기를 희망한다.